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 성혼(1535∼1598) 선생의 묘이다. 성혼은 명종 6년(1551) 생원·진사의 초시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같은 고을에 사는 이이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학문 성향에서는 이황을 지지하여 이이와 선조 5년(1572)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 선조대 초부터 여러 번 관직이 주어졌으나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이이의 권유로 이조참판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참판에 이르고 선조 27년(1594)에는 좌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갔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1602)에 사화와 관련하여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인조 11년(1633)에 다시 좌의정의 벼슬이 내려졌다. 묘역은 부인과 합장한 하나의 봉분 형태이다. 묘제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석물은 새것과 섞여 있다.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는 묘표를 세웠다. 인조 27년(1649)에 건립한 것이고, 비문은 김집이 짓고 외손자인 윤순거가 글씨를 썼다. 보편적인 옥개방부형지만 안정적이고 당당한 형태이다. 하단에는 동자석인 1쌍을 조성하였다. 머리는 쌍계형으로 묶고 두 손에는 지물을 든 형상이다. 부친인 청송 성수침 묘에도 동자석인을 조성하였는데, 창녕 성씨 가족의 공통적 묘제로 볼 수 있다. 묘역 입구에는 성혼의 신도비가 있는데, 김상헌이 글을 짓고 김집이 글씨를 썼다. 이 묘역은 묘제와 다양한 석물의 원형이 유지되고 있어 중요하다. 특히 동자석인의 조성은 지역적 공통성과 연관 지을 수 있어 학술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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