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성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평창읍 평창중앙로 158-8하리 산1 및 중리 산10 일원
이 산성은 노산성(魯山城)이라 불려지고 있는데, 초축 연대를 알 수 있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성내에서 통일신라기의 유물이 수습된 것을 고려할 때 이미 그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도 다수 수습되는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 시대까지 계속 개수되면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산성은 평창의 진산(鎭山)인 노산(魯山)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평창강이 굴곡하는 곳에 우뚝 솟은 해발 419m의 노산에 쌓았는데,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은 절벽이거나 매우 가파른 곳이어서 천험(天險)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산성은 조선 선조 초에 군수 김광복(金光福)이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권두문(權斗文) 군수가 지사함(智士涵), 우응민(禹應民), 이인노(李仁怒)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적조(古跡條)에는 노산성(魯山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석축주일천삼백육십사척고사척내유일정금반퇴락(石築周一千三百六十四尺高四尺內有一井今半頹落)라고 되어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현존성벽의 높이는 1.3m 전후이다. 성벽은 북쪽의 절벽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바로 아래 부분을 삭토(削土)하고그 바깥쪽에 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성벽을 따라 편편한 내환도(內環道)를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은 홍천 대미산성(大彌山城)의 축조법과 같은 방식이다.
노산성은 산복식 산성으로 북쪽이 가장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을 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북벽이 천험의 자연 지형에 축성하지 않은 부분을 제외하고 실제 쌓은 총 길이는 약 517m정도이다. 서벽은 약 115m 정도인데 그 중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 8.2m, 높이 5.3m이다. 사용된 돌은 편마암으로 품자 형태로 면석쌓기를 하였다. 사용된 돌의크기는 58(길이)×12(높이), 47×13, 34×14㎝정도이며, 뒷채움은 돌로 채웠다.
서벽 부분의 산 정상에는 성역화 계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원형을 많이 훼손하였다. 서벽의 일부도 산 정상에 오르는 시멘트 계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계단을사이에 두고 석축의 기단부 일부가 남아 있는데, 43(길이)×14(높이)×28(깊이)㎝, 34×20×35㎝, 36×13×35㎝ 정도의 돌을 사용하였다. 서벽에서 남벽으로 회절하는 부분에는 치와 망대를 설치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축성 형태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남벽의 길이는 약 334m인데 산 사면의 일부를 깎아내어 산성 내에 폭 6m정도의 회곽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편축을 하였는데 높이는 약 2.6m정도 남아 있다. 남벽의 성곽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동벽의 길이는 약 122m이며, 역시회곽도를 만들었다. 동벽도 대부분 붕괴되었다. 성내 시설로는 산 정상 부근에 우물지가 한 곳 있는데 규모가 7.7(동서)×8.5(남북)m이며, 깊이는 약 2m이다.
노산성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토기편과 와편들인데 특히 와편은 읍내에서 산성으로 올라가는 진입로 부근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수습된 토기편은 대체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시대에 걸친 것으로 판단된다.
수습된 기와편들은 모두 조각들이며 완형은 없지만 숫키와편보다 암키와편이 더 많다. 문양은 초문, 격자문, 사선문 등 조선시대 것으로 보이는 와편들이 다수를 차지하나 수지문과 선문, 무문의 와편들도 끼여 있다.
기와편 측면의 와도흔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 있으나 무문와편 중 1점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나있다. 와편의 문양으로 보아 노성산성은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축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몇 번의 개축 과정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노산성은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축조된 산성으로, 둘레 517m인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어 있는 상태이나 임진왜란 때 권두문 군수가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유서 깊은 곳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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